[안현웅의 마음진료실] 세상의 수많은 ‘얼굴 빨개지는 아이’에게

단정한 옷차림과 앳된 얼굴의 30대 남성 미스터 레드(Mr. Red)를 처음 만난 건 저의 작은 진료실을 가지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늦가을이었습니다. 그는 대기업에서 개발업무를 하는 분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승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의 고민은 역설적이었는데, 매주 찾아오는 개발자회의를 주관해야 하는 직급이 되어 회의 진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첫 회의 진행때 갑자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며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 갈라지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매주 회의 때마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심장이 뛰어 도무지 말을 이어가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사실 그는 이런 적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남들 앞에 서면 얼굴이 빨개지고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 되도록 남들 앞에 서기를 꺼렸으며, 대학교에 가서도 그룹과제와 발표 시간이 제일 괴로웠다고 했습니다. 그나마 대학교에서는 발표 자료를 만드는 역할을 해서 발표를 피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군대에서도, 입사 면접 때도 남들 앞에서 무언가를 말해야 하는 상황에서 너무나 불안해 어쩔 줄 몰랐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불안을 이겨 보려고 어떤 발표를 하거나 말을 할 일이 있으면 자료를 몇 번씩 준비하고 더 꼼꼼하게 준비했습니다. 몇 번씩 리허설을 해 보았지만 정작 그 상황이 되면 불안한 건 마찬가지여서 괴롭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장 자크 샹페의 ‘얼굴 빨개지는 아이’를 읽어 보도록 권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고통을 잘 설명하는 진단명인 ‘사회불안장애’라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얼굴 빨개지는 아이’의 주인공 마르슬랭(Marcelin)은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이 빨개지는 아이였습니다. 그 상황을 설명하기 힘든 나머지 외톨이가 되었지만, 역시 시도 때도 없이 재채기를 하는 르네(René)를 만나 단짝 친구가 되었듯 그의 고통은 흔하지도 않지만 드물지도 않으며,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겪는 고통임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불안을 경험하는 상황 이전에 사용할 소량의 비상용 항불안제와, 일상생활 중에 불안 수준을 낮출 수 있는 불안장애 치료제를 처방했습니다.

다행히 약물은 효과가 있었습니다. 매 회의 때마다 더듬더듬 진행을 하던 그가 비교적 매끄럽게 회의를 진행하자 상급자와 팀원들은 그가 이제 적응했나보다 생각하는 눈치라고 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중에도 전보다는 덜 불안해져서 강박적으로 발표 준비에 매달리던 모습이 조금은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회의 날짜가 다가오면 불안은 깊어졌고, 회의 전날에는 잠을 잘 자지 못하고 일찍 깨는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그에게 회의 진행에 대한 불안을 느끼는 내가 정말로 고민하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주위에서 자신에게 거는 기대를 충족하지 못할 것이 두렵다.’고 했습니다.

그에게는 그만큼이나 사람들 앞에서 나서기를 꺼려하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라며 어렸을 때부터 스피치학원, 성가대, 태권도 등을 시켜 극복하도록 요구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했고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던 그는 꾸역꾸역 아버지의 요구대로 학원과 여러 교육을 받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할 때마다 가슴이 뛰고 얼굴이 달아오르며 불안해지는 것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실망한 아버지가 자신을 혼내고는 폭음을 하시는 모습을 보고는 큰 죄책감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이후 공부에 전념한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나름 좋은 성적을 거두어 아버지와의 갈등은 줄었지만, 누군가를 실망시킬 것 같은 상황이 오면 그 때의 부담과 죄책감이 되살아나는 기분이 든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르네가 되어 주기로 했습니다. 사실은 매일 새로운 내담자를 만나는 저 또한 낯선 사람을 만날 때마다 불안해지며 가슴이 뛴다고 했습니다. 어떨 때는 그 불안을 이기려고 Mr. Red에게 처방한 약을 저도 먹을까 생각한다고도 했습니다.

그의 불안은 타고난 천성과 높은 아버지의 기대라는 환경의 결합이 만든 산물입니다. 천성은 바꾸기 힘들어도 누군가의 기대에 반드시 응해야 한다는 압박은 생각하기에 따라 다르게 느낄 수 있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개발자’로 능력을 인정받았다면 ‘회의 진행자’로 인정받을 필요가 굳이 있느냐고 질문했습니다.

무언가에 뒤통수를 맞은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던 Mr. Red에게 앞으로 타인의 기대가 느껴질 때마다 의도적으로 그 기대의 10%만 부응하는 숙제를 주었습니다. 그 압박감을 이겨내는 것은 어렵겠지만 일단 해 보면 생각보다 별 일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행히 Mr. Red는 숙제를 잘 해냈습니다. 회의 진행이 서툰 것은 그의 경력에 큰 흠이 아니었던 것이었습니다. 회의 진행 중 자신의 발표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자료를 사전에 준비해서 회의 전에 팀원들에게 보내고 숙지하도록 했고, 회의 시간과 토의 시간이 줄어들면서 그의 부담도 함께 줄어들었습니다.

게다가 코로나19가 확산하며 비대면 회의가 시작되었고, 이후 그는 더 안정되었습니다. 생각보다 별일이 아니었는데 왜 이걸 그동안 못 했는지 모르겠다며 개운한 표정을 짓는 Mr. Red를 보며 저는 함께 기뻤습니다.

저는 그에게 두 번째 숙제를 내 주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장거리 출퇴근을 유지해 온 그는 지역 내에 숙소를 구해 독립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에게 ‘이제 진짜 어른이 되었구나. 축하한다.’라는 격려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의 불안이 더 개선되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처방하던 약을 점점 줄였고, 이제 Mr. Red는 ‘졸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모든 사회불안장애 환자들이 이런 해피엔딩에 도달하지는 않습니다. 각자가 가진 타고난 천성과, 그 분이 겪어 온 삶의 경험들에 따라 다양한 경과를 겪게 됩니다.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수 많은 마르슬랭을 돕고 싶습니다. 저 역시 글에서 고백했듯 사회불안이 높은 르네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자신의 불안을 이겨낼 힘을 가진 존재들임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글 | 마음나래의원 안현웅 원장]

안현웅 원장은 순천향대 의과대학을 졸업했으며 순천향대 의과대학 정신건강의학교실 외래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대한신경정신의학회지 심사위원, 대한소아청소년정신의학회 정회원, 대한불안의학회 평생회원, 대한수면의학회 평생회원이다.

안현웅 마음나래의원 원장 kunkang198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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